건축가

일본 최초의 프리츠커상 수상자

단게 겐조의 생각과 대표작

건축가 단게 겐조

지도에서 보기 도쿄 도청사, 카가와현청사 동관, 국립 요요기 경기장 외 1곳 · 일본

오늘은 일본 최초의 프리츠커상 수상자,
단게 겐조의 대표작과 생각들로 떠나봅니다.

1987년, 일흔을 넘긴 단게 겐조는 프리츠커상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직 답을 찾고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부터 요요기 경기장, 도쿄도청사까지 전후 일본 건축의 얼굴을 만든 사람의 말이라 더 오래 남았습니다.

그의 연구실을 거쳐 간 마키 후미히코, 이소자키 아라타, 구로카와 기쇼, 다니구치 요시오까지 떠올리면 더 그렇구요.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그의 문장들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그는 도쿄대학에 들어가기까지 2년이 걸렸는데, 그 이유를 문학과 예술에 마음이 너무 치우쳤던 탓으로 돌리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1945년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을 겪고 4년 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설계경기에서 1등을 한 그는 이렇게 씁니다. ”평화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1950년대 초 로마에서 ”신들의 척도로 세워진 건축“ 앞에 감동했다는 그는, 1955년 ”아름다운 것만이 기능적이다“라고 적습니다.

그 생각이 1958년 가가와현청사가 됩니다. 목조의 보와 처마를 콘크리트로 옮긴 듯한 입면이죠. 그는 전통을 촉매에 빗댔습니다. 반응은 돕지만 결과물에는 남지 않는 것이라고요. (2022년, 전후 청사 건축으로는 처음 국가 중요문화재가 됐습니다.)

도쿄 계획 1960에서 그는 도심을 ”이상적으로는 점으로밖에 성립할 수 없는 형태“라고 진단하고, 혼란의 에너지를 구조 개혁의 에너지로 바꾸자며 도쿄만 위로 뻗는 선형 도시를 그렸어요. 60여 년 전의 계획이라고 하기엔 지금 봐도 굉장히 전위적입니다.

도쿄올림픽이 열린 1964년, 요요기 경기장과 성 마리아 대성당이 같은 해 완성됩니다. 영국의 역사가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요요기를 I. M. 페이의 내셔널 갤러리 동관과 함께 지난 25년의 두 걸작으로 꼽았습니다. (직접 가서 올려다보면 지붕 전체가 두 기둥 사이의 케이블에 매달려 있는 게 보입니다.) 대성당을 위해서는 중세 고딕 성당 여러 곳을 찾아갔다고 하구요. 여덟 장의 곡면 벽이 위로 모이며 지붕에 십자 모양 천창을 만드는 건물입니다.

1987년 수상 연설에서 그는 유엔대학과 신도쿄도청사를 예로 들며, 건축이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무언가“를 지녀야 하지만 형태와 공간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자의적인 설계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연설에서는 오늘의 사회가 개별 건물처럼 도시 전체가 ’인텔리전트‘해지기를 요구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1996년 완공된 후지TV 본사는 그 말을 건물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구요.

물론 불편한 질문도 남습니다. 그가 처음 이름을 알린 건 1942년 ’대동아건설기념영조계획‘ 설계경기 1등이었고, 축선과 상징을 다루는 방식이 전쟁 기념과 평화 기념에 반복됐다는 지적도 있었죠.

제자 이소자키 아라타는 스승의 작업을 ’건축·도시·국가의 메가스트럭처‘라 부르며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국가가 건축에게 상징을 요구하던 시대에 그 요구에 가장 아름답게 답한 건축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국가가 건축에게 상징을 요구할 때, 건축가가 어디까지 답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작업해주신 에디터K 감사드립니다.

*모든 인용구는 프리츠커상 공식 수상 연설문과 약력, 시상 연설, 그리고 단게의 글을 인용한 학술 문헌과 기사에서 확인했으며, 일부는 맥락에 맞게 번역하고 줄였습니다.

더 많은 건축가의 생각들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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