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삼청동 골목 안쪽, 쉽게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린 특별한 공간으로 떠나봅니다. SK그룹 창업주 최종건 회장이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사저 ‘선혜원(鮮慧院)’. 1968년 매입된 이 한옥은 한때 기업의 영빈관과 연수원으로 쓰이다가, 2022년 리모델링을 거쳐 2025년 SKMS 연구소 서울 분원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온지음 집공방이 총괄기획하고 SKM, BCHO 사무소가 협업한 선혜원은, 전통 한옥과 현대적 연구시설이 교차하는 독특한 결을 가집니다. 세 채의 한옥은 각각의 이름과 의미를 지녔습니다.
경흥각(慶興閣) : 대규모 행사와 교류를 담는 중심 전각 (첫 장면이 바로 경흥각에 설치되었습니다.) 하린당(夏隣堂) : 작은 마당을 품은 회의 공간 동여루(東與樓) : 삼청동을 조망하며 환대의 의미를 가진 누각
이 전통의 장면 속에, 세계적인 작가 김수자가가 함께하는데요,
김수자는 회화, 바느질, 설치, 영상,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이주, 정체성, 삶과 죽음, 존재의 경계를 탐구해온 작가입니다. 그녀의 대표적인 작업은 한국 전통 보자기를 묶은 꾸러미, ‘보따리(Bottari)’. 태어날 때, 떠날 때, 결혼할 때 짐을 싸던 보따리는 곧 삶의 전환과 이동, 그리고 기억을 담는 그릇이자 껍질이 됩니다.
이번 선혜원 전시의 핵심은 바로 거울 바닥 설치와 보따리 오브제. 특히 경흥각에 들어선 거울 바닥은 천장의 서까래와 한옥의 구조를 반사시켜,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마당과 지붕, 관객의 몸까지도 하나의 보따리에 싸이듯 비춰지며, 공간 전체가 거대한 오브제로 변모합니다.
김수자는 2024년 파리 피노 컬렉션(부르스 드 코메르스, 안도다다오가 리노베이션 한 작업으로 많이 알려져있죠!)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도 보따리 개념을 확장했습니다. 돔 천장 아래 원형 공간 전체를 거울로 덮어, 위와 아래가 무너지고 반전되는 건축적 경험을 만들었죠. 그곳에서 공간은 또 하나의 보따리가 되었고, 관객은 그 내부에 포개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서울의 선혜원 전시는 이 파리의 실험을 이어받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합니다. 파리가 돔과 거울을 통해 보편적·우주적 차원의 보따리를 제시했다면, 서울에서는 한옥이라는 장소성과 만나 보다 내밀하고 전통적인 ‘보따리’를 엮어냅니다. SK 창업주의 사저라는 기억의 장소, 기업의 역사, 한옥의 상징이 보따리와 중첩되며, 경계와 이동, 기억과 현재를 동시에 환기합니다.
저에게 이 전시는 기업 공간을 넘어선 ‘새로운보따리’처럼 다가옵니다. 삼청동 골목 안에 숨어 있던 사저가 열리고, 기업의 철학이 한옥의 잡상과 꽃담에 은유로 새겨지며, 김수자의 보따리가 이 공간을 감쌉니다. 전통과 현대, 개인과 기업, 서울과 세계가 하나의 꾸러미 안에 포개지는 순간. 공간은 곧 보따리. 그 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심상이 포개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네요.
대표작인 경흥각 이외에도, 곳곳의 디자인들이 눈길을 끕니다. 컨셉이 모두 다른 7개의 화장실, 2개의 엘리베이터는 해와 달을 담기도 하구요. 또 언제 열릴지 모르는 공간이기에 가능하다면 꼭 방문해보시길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