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행사 영상

건축을 해체하고 마주하게 되는 전시

미술관의 시간이 무너지고, 새로운 생태계를 마주하며

아트선재센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지도에서 보기 아트선재센터 · 서울 종로구

기간: 2025. 9. 3 – 2026. 2. 1
관람: 화–일 12:00–19:00, 월요일 휴관

오늘은 서울 한복판에서 ‘미술관의 시간’을 다시 쓰는 전시로 떠나봅니다. 2025년 가을, 종로 율곡로의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정독도서관 맞은편, 힐튼을 설계한 김종성 선생님의 작업 중 하나인 아트선재센터의 유리 파사드 앞에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평소 입장하던 전시장의 입구가 거대한 흙더미로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문이 사라진 자리에서 공간은 이미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고, 전시는 지하로부터 시작되는데요. 이곳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라고 작가는 말하며 전시는 시작됩니다.

비야르 로하스는 아트선재센터 전체를 건축적 해체 실험장으로 변환했는데요, 제가 관찰했던 장면들을 기록해보고자 해요. 작가는 아래와 같은 행위를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하였습니다.

1 기존 출입구 봉쇄
2 가벽·장치·화이트 큐브 구조 제거
3 온습도 제어 장치 OFF
4 콘크리트 구조·배관·설비가 노출된 몸체 드러내기
5 복도–계단–극장–화장실까지 ‘작품’으로 확장
(비상대피등을 과도한 제스처로 변경하기도 했습니다.)

미술관은 ‘작품을 보호하는 기계’가 아니라, 기후·잔해·기계·식물이 함께 점유하는 수직적 생태계로 재편되었죠.

비야르 로하스의 독자적 도구 ‘타임 엔진(Time Engine)’은 AI·시뮬레이션·비디오게임 엔진이 결합된 가상 생태계입니다. 이 엔진은 시간·기후·물질·유기체가 서로 간섭하며 ‘가속된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스스로 생성된 조각을 작가에게 ‘전달’한다고 해요. 그래서 그의 조각들은 모두 ‘복합체’라고 합니다.

전시장에는 실제 가동 중인 세탁기 위에 놓인 조각, 천장 전체를 덮는 식물과 철 구조물, 덩어리가 자라나고 바닥 석재가 뜯겨져나간 계단참, 좌석이 폐허처럼 변한 극장까지… ‘시간의 풍경’이 층층이 겹쳐져 있는 장면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작품의 소개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우리는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같은 ‘타자’와 공존하며 의미를 발명해왔다고.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적군은 누구일까요? 비야르 로하스는 ‘AI’를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협력, 창조, 위협, 공존. 지금 우리가 AI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바로 ‘적군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이죠.

1995년 《싹》 이후, 아트선재는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적 흐름을 이끌어온 기관입니다. 이번 전시는 그 역사에 대한 해체적 응답이자 ‘인류세 이후의 미술관’을 상상하는 장면이 됩니다.

좁은 계단, 수직적이고 노출된 건축 구조, 기능적이고 방문객들에게 정제된 공간을 제공했던 모더니즘의 계승자 김종성 선생님의 작업이 오히려 작가에게 ‘수직적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훌륭한 캔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AI 시대 미술관의 언어는 어떻게 나아갈까요? 이미지와 텍스트가 끝없이 생성되는 시대에 ‘AI와의 협업’ 자체가 조각의 기초가 되기도 하고, 지속가능성이라는 슬로건을 넘어 “건물이 죽은 뒤의 풍경”을 먼저 보여주기도 합니다.

몰입형 영상·브랜드 전시로 상업적 경험이 늘어난 지금, 아트선재는 다시 묻습니다.

“지금 이 건물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트선재센터의 공간을 거닐다 보면, 우리는 작품을 본다기보다 시간이 뒤틀린 건축물 속을 지나가는 타자가 됩니다.

흙, 잔해, 기계, 식물, 조각, AI.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충돌하고 공존합니다. 그 사이에서 전시는 방문객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떤 적군과 함께 살아왔고, 지금 어떤 적군과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서울이라는 도시 한복판에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틔우고 있었네요!

너무 즐겁게 감상한 전시입니다.

한정된 인원만이 입장할 수 있어 예매를 하지 않으면 원하는 시간대에 입장하실 수 없으니 미리 예매하시길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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